글과 바이브 코딩

당신이 글을 사랑한다면, 글 쓰는 이를 미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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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바이브 코딩

안녕하세요, 김성중입니다.

AI 세상에서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최근 '감도 체크'를 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출장을 갔다왔습니다. 다녀와 생각 정리가 많이 되었는데요, 앞으로 몇 편의 글을 통해 그 생각을 전달드려보겠습니다.

오늘은 그에 앞서 가벼운 이야기를 적어보았습니다.


썩은 지성

지금으로부터 벌써 10년도 더 전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에 입학했다. 인문대의 신입생이 되면 모두 1학기에 <삶과 인문학>이라는 필수 과목을 듣는다. 그 곳에서 나는 난다긴다하는 글쟁이, 골방철학자, 그리고 몽상가 지망생 300명을 만났다.

철학자가 되고 싶어서 인문대학에 갔던 나였지만, 300여 명이나 되는 전국에서 한 가닥하는 인문학자 워너비들을 만나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경험이었다. 나도 글 좀 쓴다고 잘난 체는 엄청 했지만, 문학과 철학, 사학을 어려서부터 사랑해 온 친구들을 만나니 기가 팍팍 죽었다. 누구는 니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누구는 러시아 혁명을 이야기하는데, 어지간하면 '쯧. 아는 척 하고 있네.'하고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적어도 나보다는 더 알고 있었고,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20살의 미숙함만 제외하면 꽤나 깊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었던 것 같다.

인문대학생으로서의 1학년 1학기는 그래서 꽤나 불안한 시기였던 것 같다. 표출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 수업의 마지막 과제는 동서양의 고전 몇 가지 중 하나를 읽고 서평을 쓰는 것이었다. 지금 찾아보니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 그리고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위축된 인문돌이였던 나는 그나마 가장 손쉽게 읽혔던 프랑켄슈타인을 골랐다. 한중록, 안티고네는 너무 어려워서 배제한 것이었지만 아마 그 당시에는 개똥철학을 만들어서 "아, 나는 이런건 별로야"라고 쳐냈던 것 같다.

소설책이다보니 읽는 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서평'이라는 것은 써 본적이 없었다. 지금에서야 정확하게 알았는데 서평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상을 적는 독후감과 달리, 논리적 근거를 바탕으로 책의 가치를 분석하는 글이라고 한다.

뭔가에 뾰루퉁 했던 나는 '그런게 어딨어. 글 읽고 내 생각 쓰는게 서평이지.'라고 생각했다. 노트북을 열고 잔잔한 노래 하나 틀어 놓은 채로, 편의점 커피 쪽쪽 빨아먹으며 한글을 열었다. 그리고는 가장 위에 '제목 : 썩은 지성'이라고 적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주인공인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체 '크리쳐'를 만들어 냈지만, 흉측한 외모에 혐오감을 느끼며 도망친 뒤 발생하는 비극에 대한 내용이다. 나는 썩은 지성이라는 글을 통해서 책임 없는 지성은 무가치하다는 이야기를 적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학술적 글쓰기를 할 줄 몰랐고, 알았더라도 기존 방법론을 따라가기 싫었던 '홍대병' 걸린 나는 아무렇게나 글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다.

서론-본론-결론도 없었고, 요약과 각주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다. 대신에 내가 좋아하는 글의 운율과 은유에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나는'이라는 논문에서는 등장할 수 없는 주어가 끊임없이 나왔고, 온갖 상상과 가정을 더해 글을 썼다. 마지막 문장은 역시나 결론이라기 보다는 영화식 '열린 결말' 같았으면 했다. 하룻 밤 꼴딱 새서 10여 시간만에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썼고, 다음날 낮에 교수님께 메일로 글을 제출했다.

그리고 며칠 지나 전체 학생 중 5명에게 준다는 우수상 수상자라는 연락을 받았다.

꾸짖음 대신 상장을

인문대 학장님을 포함해서 교수님 몇 분이 작은 시상식을 해주셨다. 상장에는 학생들이 쓴 서평의 제목이 적혀 있었는데, 얼굴이 붉어졌다. 내 앞 순번 수상자는 'OO에 대한 OO 연구 : OO와의 비교' 같은 제목을 달고 있었다. 내 뒷 순번도 마찬가지였다. 내 상장에는 '썩은 지성' 네 글자가 적혀 있었고, 학장님은 상을 주면서 '허허 한 번 읽어봐야겠는데'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우리 과 지도교수님은 20여 명의 동기들 글 중에 왜 내 글을 추천했을까? 그리고 교수님들은 또 왜 그렇게 추천된 각 과별 대표작 중에 내 글에 상을 주겠다고 결심했을까? (나중에 깨달은) 인문대학의 글 지향점과는 거리가 멀고도 먼 글에 학교는 꾸짖음이 아닌 상장을 쥐어줬다.

물론 그 이후의 4년은 학문으로서의 글을 배우는 뼈를 깎는 시간이었고, 내 졸업 논문의 제목은 <아르메니아 학살 부인주의 연구 : 버나드 루이스의 저술을 중심으로>였다. 하지만 나는 늘 그랬던 것처럼 가끔씩 시를 쓰기도 했고, 책 한 권 밤새서 읽은 다음 노트에 수필을 적기도 했다. 술 마시고 집에 들어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편지를 적어주기도 했다. 당시에 유행했던 오그라든다는 말을 끔찍이 싫어했던 기억이 있다.

그 상장 쪼가리 하나가 내가 글을 더욱 사랑하게 된 이유다.

글을 써보고 싶어

인문대생들이 졸업장을 숨기려고 애쓰는 테크, 벤처 바닥에서 '나 역사학자요'라고 하고 다니니 가끔 '나도 글 쓰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할까?'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나의 대답은 굉장히 간단하다.

"지금 노트를 펴서 펜 들고 아무거나 적어봐. 그냥 아무 말이나 머리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을 휘갈겨 적어."

글이란 그냥 그런 것이다. 어떤 글은 위대하지만, 모든 글이 위대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 위대한 글이 남에게 위대할 필요도 없다. 바쁘다는 핑계로 글을 안 쓰다가, 한 번 써야겠다 하면 나는 보통 아래와 같은 문장부터 시작한다.

"간만에 글을 쓰려니 뭐라고 적어야 할지 모르겠다. 왜 모를까? 지금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일까?"

조금씩 적어내리다 보면 중요한 생각들이 조금씩 결정으로 맺어지곤 한다.

글을 사랑한다면

미디어가 너무 발달하고 또 중요해지면서 글을 쓰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 느껴진다. 낭만투자파트너스도 글이랑은 별로 상관 없는 공대생들과 함께 시작했던 블로그다. 사람들의 글을 보자면 논리구조가 엉망인 글도 가끔 쓰고, 주술 호응조차 안되는 문장도 더러 보인다.

그러든 말든 무엇이 문제인가. 당신이 글을 사랑한다면 글을 쓰는 이들을 미워할 수는 없다. 논문만 글이겠는가. 속어 천지의 웹소설과 독자가 단 한 명인 연애편지도 글이다.

AI가 허무는 경계 위에서

뜬금없이 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요즘 AI 바닥에서 만나고 있는 충돌 때문이다. AI는 많은 영역에서 각자가 끔찍이 사랑해왔던 가치를 허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이런 것은 프로덕트가 아니야'라고 이야기하고, '이건 오픈소스의 정신을 허무는 거야'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이건 글이 아니야'라고 하고 '이런 디자인은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한다.

하지만 진심으로 코드를 사랑한다면 AI를 통해 코딩을 시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진심으로 글을 사랑한다면 AI로 글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미워할 수는 없다.

진정으로 어떠한 가치를 사랑한다면, 그 가치와 가까워지고자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상을 쥐어주는 일이 많아지길 바란다. 꽤나 근사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